-
시끌벅적한 신촌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 눈을 돌려보면 집이라기엔 아쉽고 방이라기엔 애매한 원룸들이 빼곡히 들어선 자취촌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학교가 있는 곳, 누군가에게는 놀러 오는 곳인 신촌이 누군가에겐 삶의 거주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연희동 자취촌은 그 밀집도가 마치 벌집을 연상시키곤 하는데, 그 안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일벌로 살아온 지 어언 3년 차인 나에겐 몇몇의 동네 친구들이 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친해졌지? 물으면 같은 동네 사니까 그렇지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만약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았으면 안 친해졌을까? 물으면 솔직히 지금처럼 친하지는 않았을 듯이라는 웃음기 어린 대답이 돌아오는. 나이도 고향도 전공도 성격도 가치관도 꿈도 가지각색으로, 공통점이라고는 찾기 쉽지 않은 우리가 이토록 긴밀한 사이가 된 것은 물리적 가까움의 영향이 컸으리라. 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술을 좋아한다는 것도 크게 한몫할 터이다. (술을 잘 마시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날, 안 좋은 일이 있는 날, 술이 땡기는 날, 아무런 별일도 없는 날 밤늦은 시간 갑작스럽게 연락해도 곧바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잠옷 바람에 슬리퍼 신고 동네 친구들과 가볍게 (때론 무겁게) 한 잔 할 수 있는 곳, 바로 동네 술집이다. 동네 술집에 가는 이유는 그곳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우리 집 근처 나의 가까운 곳에 말이다. 허나 만남의 시작은 단순히 가까움 때문이었을지라도 그곳으로 향하는 발길이 오래 자주 쌓여가면 그 어느 곳보다 특별해지는 법. 물론 저렴하고 다양한 안주와 시원한 맥주, 친절하고 유쾌한 사장님과 적당히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필수 조건이다.
첫째, 연희 노가리
연세대 서문의 오아시스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는듯한 **노가리. 연희동에도 당연지사 연희 노가리가 있다. 연세대학교 서문 자취촌 언덕 제일 아래막에 위치한 연희 노가리는 항상 복작복작거린다. 앞치마를 맨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는 연희 노가리엔 피데기, 쥐포, 닭똥집, 모듬쏘세지구이, 통감자구이 등등 대부분 만원을 넘지 않는 맛난 안주가 너무나도 다양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표제작인 노가리를 먹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먹긴 하지만 내 친구들과 나의 원 픽은 바로 김치전! 커다랗고 매콤하고 촉촉 바삭한 김치전과 쏘맥의 궁합이 아주 훌륭하다. 서비스인지 기본 안주인지 모르겠지만 오래 앉아 있다 보면 곧잘 주시는 라면땅에 바로 손을 갖다 댔다가 그 뜨거움에 화들짝 놀라는 건 어째 사람이 발전도 없이 매번 여전하다.
나의 원 픽 김치전 오늘은 정말 맥주 딱 한 잔만, 맥딱한만 하자며 모여놓고선 생맥주를 조금 들이키다 보면 곧 은밀한 시선들이 오고 간다. 끝내 누군가가 못 참고 사장님 소주 한 병 주세요를 외치면 다들 기다렸다는 듯 웃음이 터진다. 하도 자주 가서 슬슬 우리의 얼굴을 익히신 사장님도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을 지으며 소주를 가져다주신다. 3500원 딱 좋은 가격의 생맥주 500ml를 3분의 1쯤 비운 다음 소주를 채워 넣으면 마법처럼 다시 처음으로 원상복구.
간장+마요네즈+청양고추=perfect 익숙한 동네 술집에서 익숙한 우리는 익숙한 이야기를 나눈다. 오랜 시간 자주 만나, 어떤 때엔 일주일에 세 네번도 넘게 긴 밤을 함께 지새워, 도대체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남아있을까 싶어도 또 같은 이야기에, 놀랍게도 여전히 새롭게 나오는 이야기에 우리는 새로운 밤을 지새운다. 주제와 상황과 기분에 따라 살짝씩 변형되는 같은 이야기들, 그 미묘한 변주의 과정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오래, 자주 본 우리만이 서로 알아차릴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그 무게가 무거워 마음에 가라앉아 오래도록 남아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가볍게 우리 사이를 둥둥 부유하다 슬그머니 올라오는 취기와 함께 흘러가 버린다. 그렇기에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같은 동네 술집에 매일 가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더 정겨운 것과 유사한 감정이려나 싶다.
둘째, 야식 포차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연희동 굴다리 옆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골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석 깊은 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가는, 직접 데려가지 않으면 찾아가기 쉽지 않은 외진 구석에 있어 결국 진정 친한 사람들에게만 전해지는 나의 비밀 동네 술집, 야식 포차이다.
찐 포차 갬-성 연희동 근처에 잘 없는 포차 감성을 지닌 술집이라 보통 한 번 가면 그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어 단골이 되어버리고 만다. 선선한 여름밤이나 가을엔 야외 자리에서 마시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나 슬슬 추워지기 시작하면 동굴처럼 깊숙한 실내가 좋다. 이런 분위기의 술집이면 걱정되기 쉬운 화장실도 가게 가장 깊은 곳 철문 뒤에 나름 깔끔히 있으니 안심하시길. 아, 입구 쪽에 늘 항상 계시는 단골 손님 분과 한두 마디 말동무가 되어 드리면 아주 아주 아주 가끔 공짜 맥주 한 병이 떨어지기도 하는 건 정말 우리만의 비밀이다. 쉿!
깊숙하고 아늑한 동굴 내가 야식 포차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기본 안주로 나오는 오이이다. 혹시나 오이를 싫어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이를 정말 좋아하는 나에게는 기본 안주로 통 오이가 수북이 그것도 초장과 함께 나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다 먹어서 혹시 조금 더 주실 수 있냐고 슬며시 여쭈어보면 조금이라는 단어가 민망하게 더 수북이 쌓아주신다. 사장님이 혹시 대규모 오이 농장도 함께 운영하시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감사히 와삭와삭 먹는다. 술 마실 때 물을 잘 안 마시는 사람도 수분이 많은 오이랑 같이 먹다 보면 물 마신 것처럼 술이 덜 취한다. 하지만 가게 특유의 분위기와 끝없는 오이와 함께 마시다 보면 평소보다 더 마시게 되기에 결국엔 제로섬 게임이다.
야속 포차의 메로나 우리만의 비밀 아지트인줄 알았던 야식 포차는 알고 보니 영화계에선 유명한 명소인 듯했다.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들을 보며 한참 영화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중 배우를 꿈꾸는 친구가 나중에 엄청 유명해지면 지금처럼 편하게 자주 못 보겠지? 매니저를 통해서만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우스갯 소리가 오고 갔다. 그러자 미래 유명 배우 친구가 나중에 자기가 아무리 유명해져도 너네가 나 얘랑 그냥 편한 동네 친구야 하면서 전화 걸면 바로 전화 받는, 그리하여 너희의 자랑이 되고 싶다고 답했고 오글거린다고 핀잔 주면서도 내심 그 마음이 고맙고 뿌듯해 슬며시 웃음 지었다. 먼 훗날 우리 중 누군가가 엄청난 유명인이 되어도 여기 야식 포차 가장 깊숙한 곳에서 술 마시고 있으면 아무도 못 알아볼거야 라는 말에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닥다닥 작가를 꿈꾸는 친구와 과학자가 꿈인 친구가 소설을 쓰는 것과 컴퓨터 언어로 코딩하는 것에서 창작의 고통을 함께 공유하는 것, 포스터 디자이너를 꿈꾸는 친구와 과학자가 꿈인 친구가 영화 포스터와 연구 포스터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는 것, 작가를 꿈꾸는 친구와 배우가 꿈인 친구가 각자 도전한 공모전에서 본인이 얼마나 무모했는가를 겨루는 것, 작가를 꿈꾸는 친구가 우리의 대화를 차용하여 글을 썼다기에 저작권료 내라며 웃는 우리. 오로지 우리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오고 간다.
헤어질 때 아쉬움이 남지 않는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더 빠른 시일내로 또다시 만날 것을 확신해 믿어 의심치 않는 관계란. 언젠가 내가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헤어질 때 아쉬워지는 순간이 올까 하고. 그러게 우리 적당히 좀 보자 대충 답하며 술잔을 부딪히는 동네 친구들을 보며 혼자 생각했다. 각자의 인생이 흘러 흘러가 우리가 더이상 같은 동네에 살지 않는 때가 오더라도 나는 이 동네 술집에서 우리가 함께 보낸 무수히 많은 시간들을, 대화들을, 추억들을 평생의 위안 삼아 언제고 꺼내보며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나의 동네 친구들아 오늘 밤 맥딱한 하자. 늘 그렇듯 그곳 동네 술집에서.
[연희 노가리]
연희동 287-5
매일 저녁 7시 ~ 새벽 3시
[야식 포차]
연희맛로 1-10
매일 오후 ~ 새벽 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