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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여 어느 것 하나에도 온전히 마음 주며 정착할 수 없는 20대의 내가 머무르게 된 공간 신촌. 신촌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곳이기에 꽃이 피고 지듯 오늘도 어떤 가게가 사라지고 또 새로운 가게가 생겨난다. 이 시기의 내가 나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신촌에 머무르는 건 참 운명 같다 싶다가도 결국 내 발걸음은 나와는 다르게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낡고 나이 든 공간을 향하곤 한다. 내가 신촌에 머물기 이전에도 있었으며, 이후에도 있을 공간. 마음이 한껏 휘청이는 날에 찾아가면 잠시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는 나의 안식처, 바로 메시에다.
신촌 대학약국 골목의 끝까지 걸어가면 마지막 건물 2층에 메시에가 있다. 낡은 영어 간판과 온통 검은 외관은 눈에 띄지도,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않는 터라 낯선 이의 첫 방문이 쉽지 않아 보인다. 가게 전체에 커다란 창문이 있지만 불이 환하게 켜지는 일은 절대 없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보아선 문을 연 것인지, 닫은 것인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모호함도 이에 한몫하는 듯하다. 하지만 창문 속에 희미한 주황색 점이 몇 개 보인다면 계단을 올라가 무거운 철문을 용기 내 열어보길 바란다.
주황색 점점이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운 조명 아래 낡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 잠기지 않아 늘 물이 새는 세면대, 기타를 치시는 무심한 사장님과 커다란 창가 위 먼지 쌓인 술병들이 반겨준다. 만취자와 6인 이상의 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사장님의 철문 위 경고장 덕분인지 가게는 항상 조용하게 수군거린다. 날이 쌀쌀해지면 사장님이 테이블마다 작은 초 하나를 켜주시곤 하는데, 조용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테이블 위 흔들리는 촛불까지, 속 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늘 가볍게 한잔하러 왔다가 예상치 못하게 진솔하고 내밀한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고 또 마주하곤 한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수많은 술병 위에는 시간의 먼지가 잔뜩 쌓여있다. 술병의 주인이었을 사람들의 이름과 날짜 적힌 쪽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 시간엔 메시에가 그들의 안식처였겠지 생각한다. 그들이 이곳에서 부딪혔을 술잔과 나누었을 이야기, 오고 갔을 눈빛을 상상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은 떠나갔지만, 오로지 공간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그 순간을 지키고 있다. 그렇게 공간 위에 사람과 시간이 겹겹이 쌓여간다.
소복이 쌓인 시간의 먼지 메시에에는 레드락 생맥주와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 맥주와 양주를 섞은 사장님만의 메뉴가 가득하다. 레드락에 진을 섞은 Saint, 보드카를 섞은 Devil, 데낄라를 섞은 Angel 외에도 Hell, Rain, Falling in Love 등 이름도 적당히 감성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맥주와 레드와인을 섞은 Rain이다. 맥주와 와인의 만남이라니. 태초에 어떻게 그런 만남을 생각해내신 건지 감탄하며, 또 그 오묘한 맛에 감탄하며 한잔 두잔 더해간다. 안주는 따로 판매하지 않지만, 외부 안주 반입이 가능하기에 이따금 배고픈 날엔 근처 감자튀김 가게에서 포장해와서 먹어도 좋다. 배고프지 않은 날에도 기본 안주로 나오는 대통 과자와 김 과자가 메시에에서 먹으면 유독 더 맛있는 탓에 결국 사장님께 여러 번 리필을 부탁드리게 된다. 테이블 위 촛불에 과자를 데워(?) 먹다 꼭 한 번 태워주는 건 메시에를 온전히 즐기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메시에의 큰 매력 요소 중 하나는 메뉴판이었다. 작고 낡은 노트에 사장님의 손글씨로 메뉴들이 쓰여 있고, 그 뒷장엔 메시에에 머물다 간 수많은 사람들의 취중 감성, 취중 진담, 취중 예술 작품들이 빼곡했더랬다. 하지만 최근 가격을 살짝쿵 인상하며 메뉴판이 새 공책으로 교체되었다. 처음엔 괜시리 낯설고 속상했으나 한편으론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엔 이미 지나간 이들의 흔적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면, 이제는 나날이 새로운 흔적이 쌓여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생길 터이다. 또한 메시에의 역사책 속에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빈 페이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당신의 이야기로 채워주세요 어쩌면 이 글로 인해 누군가 메시에에 닿을 수 있기를. 나의 안식처가 새로운 이의 안식처가 되어 주기를. 그렇게 메시에 위에 쌓여가는 시간의 두께가 한층 더 도톰해지기를 바라본다.
[Messier]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11길 32
02-324-2503
매일 저녁 8시 – 새벽 3시
일요일은 새벽 2시까지